2017.12.05 16:23

도자기로 유명한 여주에서 열린 도자기 축제가 열렸습니다.

 

 

규모가 큰 축제로 스트레스를 확 풀리게 해줄 "여주 전국접시깨기 대회"와 도공들이 직접 배움을 주는 "물레체험"이 있어서 아이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축제입니다. 물론, 맛있는 수많은 음식들과 수준높은 작품들을 전시하는 전시관도 있었습니다.

도자기 축제에서 전시를 돌아보면서 느낀 점은 정말 흙으로 빚을 수 없는 것이 없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접시깨기 대회는 현장에서 즉석으로 신청을 하고 만들어진 그릇들을 던지는 것인데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서 안전모와 장갑을 착용하게 하였습니다.

 

 

물레체험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물론, 아이들이 할 수 있는 내용은 제한적이였지만 바로 눈 앞에서 장인의 손길을 보고, 물레 위의 흙을 빚을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요.

 

 

 

그냥 흙으로 빚은 그릇을 가져올 수도 있고, 소성비를 내고 구워진 그릇을 택배로 받을 수도 있었습니다.

 

도자기 축제이니 만치 많은 작품들로 전시장들이 꾸며져 있었습니다.

 

 

 

 

 

 

 

화장실도 예사롭지 않네요~

 

 

도자기 전시과 이외에도 반달미술관이 있어서 더 많은 작품들을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도자기"하면 그냥 그릇이나 장식품 정도만 생각했었는데, 그 쓰임이 무궁무진했습니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고, 구경도 신나게 하고 나가는 길에 도자기축제 마스코트를 만났습니다. 석양빛에 물든 마스코트가 더욱 귀엽게 보였습니다.

 

 

 

Posted by 생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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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03 00:10

 

명성황후 생가를 지나 신륵사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단체 여행을 처음해보는데 모든 여행에는 장단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단체 여행의 장점은 여러 사람들고 함께 즐겁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일정이 정해져 있어서 내가 원하는 만큼 볼 수 없다는 것이였습니다.

 

즉... 신륵사에서 두루두루 구경을 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보통은 이렇게 보물이 많은 절에서는 아이들과 보물 이야기를 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이 날은 무슨 마라톤 대회라도 하듯이 보물들을 열심히 보고만 왔습니다.

단체 여행은 아무래도 한동안 가지 않을 듯... ^^;

 

아무튼 무사히 천년고찰 여주 신륵사에 도착을 했습니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고 하나 정확하지는 않고, 절 이름 또한 '신륵'이라고 한 이유도 정확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절이 대찰을 이루게 된 것은 보제존자 '나옹'이 이곳에서 갖가지 이적을 보이면서 입적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신륵사의 입구에는 고색창연한 커다란 문이 있었습니다.

왜 이 문이 매표소 앞에 세워져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템플스테이를 겨냥한 것이 아닌가 혼자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유는 오른쪽에 적혀있는 문구 때문... 三日修心千載寶(삼일수심천재보), 즉 3일만 마을을 수양하여도 천년의 보물을 품을 수 있다는 이 말은 3일만 템플스테이를 하여도 천년고찰 신륵사의 정기를 품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

 

 

아무튼 일정에 쫓기는 입장이라 여기 저기 열심히 돌아다녔습니다.

 

<신륵사대장각기비> 이 비는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비문으로 몯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고 합니다.

 

 

신륵사에서 꼭 보고 싶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륵사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였고, 다른 하나는 <신륵사 삼층석탑>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이였습니다.

 

<신륵사 다층전탑>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고려 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신라 시대의 전탑은 거의 틈이 없이 벽돌을 쌓은 데에 이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를 면토로 메운 것이 특징입니다.

그 유려한 모습이 어찌나 예쁜지요... 하지만 세월이 흘러서 조금씩 금이 가고 틀어진 모습이 마음 아팠습니다.

 

 

또한, 나옹화상을 화장한 자리에 세워진 <신륵사 삼층석탑>은 1박 2일에서 유홍준 교수님이 설명하셨던 <경주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자연암반을 기단부로 삼을만큼 커다란 불심을 품었으나, 남한강과 주변의 산세에 어우러지는 아담하고 친근한 모습의 탑이였습니다.

 

 

다층전탑과 삼층석탑이 바라보는 남한강의 풍광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신륵사의 또하나의 보물 <신륵사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은 특이하게 화강암이 아닌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단단하여 굽히지 않는 대리석의 성질때문인지 많이 훼손이 된 모습이였습니다.

 

 

약 600년을 살았다는 나이에 비해서는 키가 작은 향나무도 경내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석종인가 해서 얼른 달려가서 본 원구형석조부도와 팔각원당형석조부도입니다. 부도란 스님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어느 스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하네요.

 

 

보물은 역시 범상한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높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서 겨우 만난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와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입니다.

많은 이적을 행하며 입적한 보제존자 나옹의 사리를 모신 종 모양의 부도입니다. 그리고 그 부도를 묵묵히 긴 세월 밝혀온 석등... 세월의 흔적을 가득 안은 모습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왠지 소외당한 듯 보호막이 쳐져있는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가 서있었습니다. 음... 문화재청에서 이 세가지 보물들을 좀 더 자연스럽고 고풍스럽게 보호막을 쳐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맘껏하고 왔습니다.

 

 

신륵사 내에 있는 또하나의 보호수... 약 600백년 된 은행나무라고 합니다.

 

 

급하게 이리저리 보러다니느라 오히려 제대로 보지 못한 신륵사의 모습... ㅠㅠ

 

 

버스를 타러 돌아가는 길에 보이는 화장실!

도자기의 고장답게 화장실도 특이하게 생겼습니다~ ^^

 

 

처음 신륵사 주차장에 도착해서 놀랐던 <여주박물관>의 모습... 이렇게 작은 박물관은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촉박해서 보지 못하기도 했지만, 굳이 들어가보고 싶지도 않았던 박물관... 이제와서 생각해보니 어떤 유물이 전시되어 있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정말 허위허위 신륵사를 보고 농촌체험마을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Posted by 생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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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life-lineup.tistory.com BlogIcon +요롱이+ 2013.03.03 12:3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덕분에 너무 잘 보고 갑니다^^
    기회가 되면 저도 찾아가보고 싶은걸요^^

  2. Favicon of http://stockm.tistory.com BlogIcon S매니저 2013.03.03 13: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너무 잘 보고 갑니다^^
    좋은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2013.03.01 23:34

얼마 전 일본의 독도 발언에 대해서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 필연적으로 나온 역사는 역시 '명성황후'...

아이들은 어떻게 한 나라의 왕비가 일개 졸개에 의해서 시해를 당할 수 있는 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명성황후의 생가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얼른 짐을 싸들고 나섰습니다.

 

이번 여행은 슬로우빌리지 회원님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였습니다.

제가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서 전철 안에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역사 저술가 김정미님의 글을 접하게 되었는데, 명성황후에 대한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어놓으셨더라구요. 그 중 아이들에게 설명한 내용은...

 

"조선의 역사 속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여인들은 대부분 친정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을 뒤에서 조종한다거나, 왕이 죽은 후 수렴청정을 하는 등 숨어서 하는 정치를 했다면, 명성황후는 전혀 달랐단다. 

살아있는 왕, 고종보다 더 외국의 세력에 주목을 받으면서, 사실상 왕과 권력을 나눠 가졌다고도 보이는 명성황후의 존재는 당시 꺼져가는 조선의 상황을 고려해 생각해보아도 매우 놀라운 일이였단다."

 

 

이야기를 나우며 도착한 명성황후 생가의 옆에는 작지만 단아한 명성황후기념관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기념관 안에는 기념관 만큼이나 작고, 단아한 내용들 정도만 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여인의 몸으로 무서운 시아버지, 대원군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대원군이였단다. 사실, 대원군이 명성황후를 왕비로 삼았던 이유는 바로 인현왕후를 낳은 뼈대있는 가문이지만, 몰락한 집 안의 여식이였기 때문이란다. 외척세력의 발호를 막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사실, 맞는 말이지. 명성황후는 아무런 세력도 발판도 없이 궁에 들어가게 돼. 아마도 명성황후는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왕비가 되었겠지만 현실을 달랐단다. 이미 다른 이와 사랑에 빠진 고종, 이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대원군을 보면서 아마도 명성황후는 일생에서 가장 외롭고, 서러운 시간을 보냈을 거야.

 

이때, 명성황후는 절망하지 않고, 조용히 책을 읽고, 세상도 읽으면서 서서히 정치적 능력을 자신도 모르게 쌓았다고 하는 구나. 그러기에 나중에 대원군의 세력을 자신의 세력에 끌어들이면서 대원군을 내쫓을 수 있었던 거야."

 

 

명성황후기념관을 나서니 '명성황후순국승모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에 있는 건청궁 내 옥호루에서 일본 안인들에 의해 시해당했다는 내용의 비...

 

 

명성황후생가는 정말로 한 나라 왕비의 생가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였습니다.

명성황후가 8세까지 살던 집으로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묘막으로 건립되었던 집이라고 합니다.

 

 

 

명성황후가 어릴 적 살았던 별당. 별당아씨였던 명성황후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었습니다.

 

 

 

"지나치게 총명한 명성황후의 적극적인 정치 개입은 결국 자신의 입지를 굳히려는 일본의 말도 안되는 계획의 목표가 되었던 거야. 이를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 하고, 어처구니 없이 국모를 잃은 백성들이 일본에 원수를 갚기 위해 일어난 항쟁을 '을미의병'이라고 한단다.

 

일본의 압력에 의해 폐서인 되었던 명성황후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후로 추봉되었단다. 죽은 지 2년 만에 겨우 국장이 치워졌고, 홍릉에 안치되었지.

 

첫 걸음은 현명하게 떼었을 지라도 사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보는 항상 현명하였던 것은 아니였단다. 그러기에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오늘날까지도 엇갈리고 있단다. 나라를 망국의 길로 내몬 왕비, 구국을 위해 몸바친 시대의 여걸 등등 말이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려운 시대 속에서 어떻게 하든지 나라를 지키려 하던 명성황후의 마음이란다."

 

한참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두런두런하다가 제기차기 예선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열심히 제기차기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만... 얘야... 제기는 옆차기로 해서는 아니된단다... ㅠㅠ

 

 

하지만, 시간관계로 제기차기 예선전 없이 명성황후 생가에서 나와 신륵사로 향하였습니다.

Posted by 생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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